Kevin Maurice Garnett
케빈 모리스 가넷

생년월일 | 1976년 5월 19일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그린빌 |
출신학교 | 몰딘 고등학교 |
신장 | 211cm |
체중 | 109kg |
포지션 | 파워포워드 (PF) |
드래프트 | 1995 NBA Draft 1라운드 5순위 |
소속 팀 |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1995 ~ 2007) 보스턴 셀틱스 (2007 ~ 2013) 브루클린 네츠 (2013 ~ 2015)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015 ~ 2016) |
등 번호 | No.21 (미네소타), No.5 (보스턴), No.2 (브루클린) |
주요 수상내역 | NBA 챔피언 (2008) NBA 정규시즌 MVP (2004) NBA 올스타 14회 (1997-1998, 2000-2011) NBA All-Star MVP (2003)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2008) All NBA First Team 4회 (2000, 2003-2004, 2008) All NBA Second Team 3회 (2001-2002, 2005) All NBA Third Team (1999, 2007) NBA All Defensive First Team 9회 (2000-2005, 2008-2009, 2011) NBA All Defensive Second Team 3회 (2006-2007) NBA All Rookie Second Team (1996) NBA 리바운드 왕 4회 (2004-2007) |
Intro. NBA 코트 위에 나타난 외계인, 케빈 가넷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파워포워드이자, NBA 게임인 2K 시리즈를 플레이할 때 늘 파워포워드로 영입했다. 그래서 파워포워드 전설 중 첫 번째 주자로 낙점했다.
1995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1라운드 5순위로 지명되며 오랜 시간 미네소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다. 어마어마한 운동 능력과 전방위를 압박하는 수비력을 기반으로 준수한 득점 능력과 팀의 컨트롤 타워 역할도 수행했다. 그야말로 토탈 패키지형 빅맨의 표본이었다. 6시즌 연속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하며 그 당시에는 게임에서나 볼 법한 선수였다. 여기에 큰 키에 빼빼 마른 몸과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외형도 한몫하며 팬들은 그에게 '외계인'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빅터 웸반야마에게 붙여진 별명의 시초인 셈이다.
팔방미인인 케빈 가넷의 가장 큰 강점은 수비. 긴 팔과 포지션 신장 대비 빠른 풋워크에서 나오는 가로 수비, 가공할만한 점프력을 지닌 세로 수비 모두 뛰어났고, 여기에 BQ마저 좋아서 수비 전술 이해도도 높은 편이었다. 여기에 스크린을 타고 돌파하는 가드를 2선에서 잡아먹는 수비로 많은 재미를 봤다.
현대 농구에서 가드들이 상대적으로 느린 포워드를 헌팅하며 속도와 기술을 앞세워 미스매치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넷의 경우 헌팅을 당하기는 커녕 속도에 밀리지 않으면서도 신장의 이점을 살려 압박 수비를 가했다. 신장 대비 체중이 적게 나가는 편이었지만, 힘도 강한 편이라 덩치를 무기로 들어오는 빅맨들의 포스트업도 잘 막아냈고, 보드 장악력도 뛰어나 4년 연속으로 리바운드 왕에 올랐다.
가넷의 뛰어난 기량과 별개로, 미네소타의 전력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는데 매번 우승 도전에 실패하자 좌절한 가넷은 결국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한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적 소식을 들은 팬들도 그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응원에 힘입은 가넷은 보스턴의 BIG 3 중 한 명으로 활약하며 우승을 이루게 된다.
그 후 브루클린 네츠에서 잠시 몸 담았다가 친정 팀인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 돌아와 팀 내 유망주들의 리더로 활약하게 된다. 과거에 비해 퍼포먼스가 많이 떨어졌지만 팀 레전드인 가넷에게 보내는 팬들의 함성은 여전히 우렁찼다. 그러나 가넷은 오랜 기간 코트를 누비며 쌓아온 마일리지 탓에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며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Chapter 01. 고교 농구를 지배한 소년
케빈 가넷은 중학교 시절부터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보여주었고, 몰딘 고등학교에서 고교 농구를 시작했다.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지역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인종차별 문제에 휘말리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몰딘 고교를 떠나 시카고에 있는 패러것 고등학교로 전학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패러것 고교에서의 가넷은 가히 압도적이었으며, 경기당 평균 25.2득점-17.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패러것을 주(州)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사상 최초로 고교 3학년 때 일리노이 주의 Mr.Basketball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룬다. (미국의 공립 고등학교는 대부분 4년제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전미 고교 농구 선수의 올스타전이나 다름 없는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 게임에 출전하게 되었고, 18득점-11리바운드-4어시스트-3블록슛을 기록하며 MVP에 선정되었고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고교 레벨에서 적수가 없었던 가넷은 NBA 스카우트들의 이목을 끌었다. 원래 가넷은 대학 무대인 NCAA로 가고 싶었지만, 뛰어난 농구 실력과 달리 학업 성적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가넷에겐 농구보다 공부가 더 어려웠던 것. 지금과 달리 당시 NBA는 고교 졸업 후 드래프트 직행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고민 끝에 그는 NCAA가 아닌 NBA로 향했다.
데릴 도킨스 이후 20년 만에 탄생한 고졸 NBA 선수의 탄생이었다.
Chapter 02.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알파(Alpha)가 되다.

1995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한 케빈 가넷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부터 1라운드 5순위로 지명받게 된다. 이로써 케빈 가넷은 고졸 NBA 선수가 되었고,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프랜차이즈의 영원한 '늑대 대장'을 데려오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NBA 신인 공개 훈련에서 보여준 엄청난 운동 능력과 다재다능함을 보여준 그에게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프로 레벨의 벽은 쉽지 않았다. 당시 미네소타의 감독이었던 빌 블레어는 211cm로 장신이지만, 체중이 100kg도 되지 않은 삐쩍 마른 신인을 중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팀의 에이스였던 크리스찬 레이트너는 가넷의 플레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자 미네소타의 사장이었던 케빈 맥헤일은 빌 블레어 감독을 해고하고, 크리스찬 레이트너를 애틀랜타 호크스로 보내버리면서 가넷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때 새로 부임한 감독이 바로 NBA의 대표적인 명장 중 하나로 꼽히는 플립 숀더스다.
숀더스 감독은 팀의 미래로 낙점된 가넷의 성장을 위해 출장 시간을 30분 이하로 제한하며 철저히 관리했다. 그럼에도 가넷은 한 경기 33득점을 올리기도 하는 등 가능성을 보여줬고, NBA All-Rookie 세컨드 팀에 오르며 에이스가 될 자질을 증명했다.
가넷의 두 번째 시즌인 1996-97 시즌을 맞이하며 미네소타는 백코트에서 가넷을 서포트할 수 있는 스테판 마버리를 영입하며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런 지원에 힘입은 가넷은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만 20세의 나이로 첫 NBA 올스타전에 얼굴 도장을 찍게 된다. 팀 역시도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비록 하킴 올라주원, 클라이드 드렉슬러, 찰스 바클리가 버티고 있던 휴스턴 로케츠를 만나 3:0으로 광속 탈락하긴 했지만 말이다.
출장 시간 제한도 풀리며 본격적으로 팀의 주전 파워포워드로 출전하기 시작한 케빈 가넷의 성장세는 멈출 줄 몰랐다. 이런 그에게 미네소타는 1997년 오프시즌에 1억 2천 6백만 달러(당시 한화로 약 1,200억원)의 초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가넷은 이에 보답하듯 꾸준히 개인기록과 기량을 향상시키며 미네소타를 8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었고, 자신에게 미래를 맡긴 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미네소타는 매번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한계를 보였다. 1998-99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는 라이벌 팀 던컨이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만나 단 1승만을 거두고 탈락했다. 이후 2002년도 플레이오프에서는 디르크 노비츠키가 이끄는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저조한 성적은 가넷을 보좌할 만한 파트너가 없었고, 가넷의 가능성을 본 미네소타가 안긴 천문학적인 연봉이 팀의 전력 보강에 방해가 되었던 탓도 있다. 물론 스몰마켓이었던 미네소타가 슈퍼스타를 데려오기 쉽지 않았고, 다른 강팀에 비해 투자도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Chapter 02-1. 미네소타 버전 BIG 3의 결성, 그러나...

2003-04 시즌, 미네소타는 더이상 손놓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케빈 가넷 에라(ERA)에서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 전력 보강을 시도했다. 과감한 트레이드를 통해 라트렐 스프리웰과 샘 카셀을 데려오며 고군분투하던 가넷에게 또 다른 날개를 달아주었다.
자신을 서포트해줄 수 있는 선수들과 함께 하게 된 가넷은 평균 23.4득점-13.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MVP를 수상하면서 리그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다. 미네소타 또한 가넷-스프리웰-카셀 삼인방의 힘으로 서부 컨퍼런스 플레이오프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결승에서 만난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이 이끄는 LA 레이커스를 넘지 못하며 패퇴한다.
비록 레이커스에 패했지만, 창단 이후 첫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 무대도 진출한 만큼 가넷과 미네소타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라트렐 스프리웰과 샘 카셀이 연봉 문제로 미네소타와 갈등을 겪으면서 태업에 가까운 플레이를 펼치기 시작했고, 팀 분위기는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때 가넷도 많은 상처를 받았고, "농구는 팀 스포츠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라며 울분을 토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적 지주이자 감독인 플립 숀더스가 해고 되면서 미네소타에 대한 가넷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그럼에도 팀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2006-07 시즌까지도 팀에 트레이드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매직 존슨은 방송에서 "케빈 가넷은 할만큼 했다. 이제 떠날 때가 됐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네소타의 팬들 조차도 가넷의 상황을 안타까워했고, 그가 이적을 택하는 것도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2007년에 들어서자 결국 고민 끝에 트레이드를 요청하며 시장에 나오게 된다. 가넷을 원하는 팀은 시카고 불스, LA 레이커스, 보스턴 셀틱스 등 다양했다. 그는 보스턴 셀틱스로의 트레이드만은 거부했다. 당시 보스턴은 폴 피어스라는 걸출한 선수를 보유하긴 했지만, 미네소타와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네소타에서 원맨팀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보스턴으로 가게 되면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될 것을 우려한 셈이다.
그러나 보스턴 셀틱스는 시애틀 슈퍼소닉스로부터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레이 앨런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고, 가넷 또한 보스턴으로 가는 것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미네소타와 보스턴 간에 케빈 가넷 트레이드는 성사되기에 이른다.
Chapter 03. 보스턴 BIG 3의 탄생, 그리고 영광의 챔피언에 오르다.

케빈 가넷과 레이 앨런, 폴피어스의 결합은 NBA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후 선수들이 BIG 3를 결성하는 트렌드가 나타나는 시작점이었다. 대표적으로 르브론 제임스와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쉬가 뭉친 마이애미 BIG 3가 있다. 비난을 받았던 마이애미와 달리, 보스턴의 BIG 3는 오히려 팬들이 환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케빈 가넷은 미네소타에서 외로운 싸움을 펼쳤다. 레이 앨런은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폴 피어스는 보스턴 셀틱
스를 각각 홀로 힘겹게 팀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커리어 말년에 우승 반지를 얻기 위해 모였다. 소위 농구 좀 하는 형님들이 우승 한 번 해보겠다고 뭉친 것. 그들의 고군분투를 알고 있던 팬들이었기에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던 것이다. 30대 후반까지도 활약이 두드러지는 지금과 달리, 이 때는 30대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선수 생활 말년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2007-08 시즌은 케빈 가넷의 최대 강점인 수비가 빛을 발했다. 레이 앨런-폴 피어스라는 걸출한 득점 머신들이 있었고, 플레이메이킹은 켄터키 대학의 출신 신인 가드, 라존 론도가 있었다. 이에 득점과 경기 조율이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난 가넷은 수비형 빅맨으로 변신을 시도했고, 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물론 그렇다고 가넷의 득점이 아예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최고의 해결사로 불리던 폴 피어스의 평균 득점은 19.6점이었는데, 가넷은 18.8득점을 기록하면서 겨우 0.8점 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또 다른 득점원인 레이 앨런이 있었기 때문에 보스턴 삼인방이 고르게 득점을 올린 셈이었다.
수비에 집중한 가넷은 그야말로 상대방에겐 재앙에 가까웠다. 녹슬지 않은 볼에 대한 집중력, 밀리지 않은 에너지 레벨로 여전히 리그 최고 수비수의 위용을 보였고, 그리고 같은 팀 빅맨들을 끊임없이 독려하며 팀 수비를 한 단계 위로 올려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되는 쾌거를 누렸다.
보스턴의 리더는 폴 피어스였지만 앞장서서 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특유의 고함을 지르며 가슴을 두드리는 세레머니를 했던 케빈 가넷이 보스턴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덕분에 끈끈한 팀 분위기를 유지했던 보스턴은 정규 시즌 66승 16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상대는 조 존슨, 조쉬 스미스 등이 버틴 애틀랜타 호크스였고,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도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펼치면서 어렵사리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만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배드 보이즈 2기' 리처드 해밀턴과 테이션 프린스, 벤 월러스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막강한 수비력도 보스턴 BIG 3를 제어하지 못했고, 보스턴은 4승 2패로 디트로이트를 무너뜨린다.
가넷은 생애 첫 파이널 무대에 오르게 되고, 매번 자신을 좌절시켰던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끄는 LA 레이커스를 만나게 된다. 천적 관계를 청산이라도 하듯이 경기 당 평균 18.2득점-13리바운드-1.4블록슛을 기록하면서 골밑에서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강한 수비를 앞세워 레이커스의 공격을 막아냈고 특히 파우 가솔과의 매치업에서 우위를 점하며 리그 최고의 빅맨 지위를 공고히 했다.

이런 가넷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은 결국 4승 2패로 레이커스를 패퇴시키며 꿈에 그리던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마지막 경기 후 인터뷰에서 가넷이 외친 "Anything is Possible, Anything is Possible!" 은 그의 열정을 상징하는 명대사로 남았다.
이후 가넷은 보스턴과 함께 리그에서 강팀으로 군림했지만, 계속 되는 그의 부상과 전력 약화로 다시 우승에 도전하기 어려워졌다. 2009년도에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팀에서 이탈하며 큰 타격을 입었고, 2010년에는 결승전에서 LA레이커스와 맞붙었지만 7차전까지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하며 우승을 놓쳤다. 2011년에는 보스턴 BIG 3를 벤치마킹하여 르브론 제임스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이애미 BIG 3에게 패배하며 사실상 세대교체의 신호탄이 쏘아올려지게 된다.
2012-13 시즌, 팀의 주축이었던 레이 앨런-폴 피어스-케빈 가넷 삼인방의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지만, 또 다시 마이애미 히트를 만나 7차전 접전 끝에 패배하고 만다. 결국 보스턴은 리빌딩을 결정하며 케빈 가넷은 폴 피어스, 제이슨 테리와 함께 브루클린 네츠로 트레이드 되면서 가넷의 보스턴 커리어는 막을 내리게 된다.
Chapter 04. 세월의 야속함, 그리고 돌아온 늑대 대장
브루클린 네츠 시절은 언제까지나 철인으로 군림할 것 같았던 케빈 가넷도 세월의 야속함을 느꼈다. 부상과 노쇠화로 많은 경기에 결장하고, 출전 시간도 줄어들면서 평균 득점도 커리어 한자리 수대로 떨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넷은 여전히 팀의 정신적 리더로서 경험과 리더십을 발휘하며 팀 내 영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커리어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던 때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케빈 가넷에게 손을 내밀었다. 팀 내 영건들을 위한 정신적 리더가 필요한 데, 이 자리를 채워달라고 가넷에게 요청한 것. 가넷은 비록 팀의 한계를 느끼고 떠났었지만, 자신의 NBA 커리어가 시작됐던 미네소타에 여전히 강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늑대 무리로의 복귀를 선택한다.
"If LeBron can go home, why can't I?"
르브론도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뭐야?

미네소타에는 자신의 옛 스승인 플립 숀더스 감독이 복귀해 있었고, 다시 한 번 그와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2015년 2월 25일. 대망의 미네소타 복귀전에서 케빈 가넷에게는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난다.
2003년 홈 경기에서 가슴에는 늑대, 팔뚝에는 케빈 가넷의 별명인 KG를 쓴 한 팬이 미네소타 댄스 타임에서 웃통을 벗고 춤을 추다가 보안 요원에 의해 끌려나간 적이 있는데, 이 팬의 이름은 존 스위니이고 이후 '지글리 보이'로 유명세를 탔다.
그로부터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지글리 보이는 나이를 먹었고 이제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었다. 열성 팬이었던 그는 8년 만에 홈으로 돌아온 케빈 가넷의 복귀전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그리고 미네소타 구단은 그를 전광판에 띄웠다. 처음에는 한사코 춤추기를 거부했지만, 자신의 두 아이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열광적인 춤을 선보였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벗어던졌다. 그의 몸에는 "Welcome Home KG (복귀를 환영합니다, 케빈 가넷)" 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가넷의 복귀 인사를 미리 준비한 했던 것이다. 팬들은 기립박수를 건넸고, 가넷 역시도 즐거워하며 그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은 가넷과 미네소타는 그 날의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축제 분위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즐거웠던 복귀전과 달리 가넷은 여전히 부상에 시달리며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요 전력으로 합류한 것이 아닌, 영건들의 멘토로 합류한 만큼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2016년 9월, 공식적으로 NBA 은퇴를 발표하며 21년 동안의 긴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된다.
Outro. 늑대 대장의 마지막 하울링
케빈 가넷의 은퇴로 1995년도 드래프트의 마지막 현역 선수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비록 은퇴했지만 여전히 농구 관련 업계 종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TNT의 Area 21의 해설자로 활동하며 특유의 열정적인 성격과 직설적인 분석으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2020년, 가넷은 NBA에서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같은 해 명예의 전당에 오른 코비 브라이언트, 팀 던컨과 함께 2000년대 NBA를 지배했던 세 거인의 마지막 챕터를 장식했다. 2022년 3월 13일에는 보스턴 셀틱스는 홈 구장에서 그의 등번호 5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며, 그를 기념했다. 이 자리에는 레이 앨런, 폴 피어스도 함께 하며 그에게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줬다.
케빈 가넷은 단순한 농구 선수를 넘어, 열정과 투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남았다. 그의 리더십과 독보적인 카리스마는 NBA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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