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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basketball/풋내기슛

[03 Draft] 마이애미의 심장, 'Flash' 드웨인 웨이드

Dwyane Tyrone Wade

드웨인 타이론 웨이드

생년월일

1982년 1월 17일 / 미시간 마케트 태생

출신학교

마케트 대학

신장

196cm

체중

99kg

포지션

슈팅 가드 (SG)

드래프트

2003 NBA Draft 1라운드 5순위

소속 팀

마이애미 히트 (2003 ~ 2016)

시카고 불스 (2016)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17 ~ 2018)

마이애미 히트 (2018 ~ 2019)

등 번호

No.3 (마이애미, 시카고), No.9 (클리블랜드)

주요 수상내역

NBA 파이널 우승 3회 (2006, 2012, 2013)
NBA 파이널 MVP (2006)
NBA 득점왕 1회 (2009)
NBA 올스타 13회(2005-2016,2019)
All-NBA 퍼스트 팀 2회 (2009-2010)
All-NBA 세컨드 팀 3회 (2005-2006, 2011)
All-NBA 써드 팀 3회 (2007, 2012-2013)
All-디펜시브 세컨드 팀 3회 (2005, 2009-2010)
NBA All-Rookie 퍼스트 팀 1회 (2004)
NBA All-Star MVP 1회 (2010)


Intro. 공과 함께 현란한 춤사위를 펼쳤던 테크니션 플레이어, 드웨인 웨이드

03 Draft 시리즈 두 번째 주자, 'Flash' 드웨인 웨이드. 2003년 NBA 드래프트를 통해 5순위로 마이애미의 부름을 받았으며, 마케트 대학에서 3년을 보낸 후 드래프트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드래프트 동기인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서니보다 2살이 더 많다. 드래프트 당시에는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서니로 인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리그 최고 수준의 스피드와 퍼스트 스텝으로 돌파에 있어선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뛰어난 볼 핸들링과 패스 능력도 인정받아 데뷔 당시에는 포인트가드로 뛰었다. 순간적인 방향 전환과 강인한 신체를 지녀 수비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비수를 유린한다.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자랑하는 만큼 인-게임에서 멋진 덩크를 자주 터뜨렸다. 미드 레인지에서 터뜨리는 점프 슛도 준수한 편이어서 수비수들이 그를 막기에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웨이드의 인-게임 덩크.

독특한 것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커리어에 따라 세 단계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데뷔 시즌부터 2007년까지인데, 스피드를 이용해 수비진을 농락하며 득점을 올렸고 간간히 미드 레인지 점프 슛을 섞어주면서 손쉽게 득점을 만들어냈다. 특히 수비수 2명 사이로 파고 들어가 득점을 만들어내는 스플릿 디펜스는 웨이드의 전매특허였다.

 

두 번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를 꾀했다. 날렵했던 몸은 사라지고 다소 후덕해진 모습으로 훈련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며 팬들은 우려를 보내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웨이드는 혹독한 벌크-업을 통해 스피드를 잃지 않고 더욱 강력해진 파워를 앞세워 테크닉이면 테크닉, 스피드면 스피드, 파워면 파워 모든 면에서 S급 공격수로 탈바꿈한다.

 

세 번째는 마이애미 Big 3 결성 이후 커리어 마지막까지 이어진 플레이 스타일인데, 자유 계약으로 합류한 르브론 제임스가 사실상 볼 핸들러로 뛰게 되면서 온 볼 플레이어였던 웨이드는 오프 더 볼에 집중하게 되고, 르브론과 투맨게임 또는 빅맨의 스크린을 받아 효율적인 득점을 만들어내게 된다. 르브론이 클리블랜드로 돌아간 후에는 무릎이 웨이드의 스피드를 버티지 못하면서 포스트-업과 점프 슛 비중을 늘렸다.

 

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정상급 레벨로 평가받는데, 특히 블록 슛 부문에서는 마이클 조던과 더불어 최고의 가드 블라커로 꼽혔다. 골밑 득점이 많고 블록 슛이 뛰어나 '동부 센터'라는 이색적인 별명도 갖게 된다.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서니의 라이벌리 형성으로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2005-2006 시즌 파이널에서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이며 3인방 중 가장 먼저 NBA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자유 계약으로 합류한 르브론 제임스-크리스 보쉬와 함께 2차례 우승을 따내면서 마이애미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팻 라일리와의 불화로 팀을 떠났다가 마이애미로 다시 복귀하며 커리어를 마무리한다.


Chapter 01. 마케트 대학 돌풍의 주역, NBA를 정조준하다.

많은 선수들이 그랬듯이 웨이드 역시 고교 시절부터 넘치는 재능을 주체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풋볼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범상치 않은 운동능력을 보여주게 된다. 고교 2학년 때부터는 출전시간이 더욱 늘어나면서 농구에 전념했고, 3학년 때는 소속 학교의 득점-스틸 부문에서 신기록을 달성한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웨이드의 농구 개인 성적표와 달리 학업 성적표는 처참한 수준이었는데, 이 때문에 오직 3개 대학에서만 그를 향해 러브콜을 보낸다. 선택 폭이 좁았던 웨이드는 마케트 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하지만, 그의 학업 문제가 발목을 잡게 된다. NCAA가 설정한 학업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농구부 활동을 전면 금지당한다. 부단한 노력 끝에 2학년 때부터 대학 무대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마케트 대학 시절 드웨인 웨이드.

대학 무대에 나타난 웨이드는 1년 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펄펄 날아다닌다. 그리고 3학년이 되던 해에 그는 마케트 대학을 '3월의 광란'으로 이끌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지역 파이널 무대에서 만난 탑 시드 켄터키 대학. 켄터키 대학은 무려 26연승을 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웨이드 한 명에게 완패를 당한다. 웨이드는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켄터키 대학을 꺾고 파이널 포까지 진출하게 된다. 비록 NCAA 토너먼트 우승까지 달성하진 못했지만, 자신에게 대학 무대가 좁다는 것을 확인한 웨이드는 NBA 진출을 선언한다.


Chapter 02. 마이애미의 슈퍼 루키가 에이스로 성장하다.

2003년 NBA 신인 드래프트는 르브론 제임스의 독무대였다. 게다가 카멜로 앤서니까지 드래프트에 참여하면서 웨이드의 주목도는 더욱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고, 전체 5순위로 마이애미 히트에 입단하게 된다.

 

드웨인 웨이드(좌) - 팻 라일리(우)

웨이드는 데뷔 시즌에서 슈팅 가드가 아니라 포인트 가드로서 경기에 나서게 된다. 볼 핸들링과 패스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웨이드의 NBA 첫 상대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웨이드는 첫 경기부터 선발 출전하며 무려 41분이나 뛰었다. 득점도 18점을 올리면서 순조롭게 리그에 적응하는 듯 했다.

 

그러나 웨이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 날 경기를 패배했고, 내리 5연패를 기록하며 팀이 하락세에 접어든다. 웨이드 역시 5득점, 4득점만 기록하면서 개인적인 부분에서도 부진의 늪에 허덕이게 된다. 하지만 점차 반등에 성공한 마이애미는 최종 성적 42승 40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생애 첫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뉴올리언스 호네츠를 상대로 맞이한 웨이드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승부 끝에 뉴올리언스를 패퇴시킨다. 다음 라운드에서 만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무너졌지만, 마이애미는 웨이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2년 차 시즌, 당시 LA 레이커스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와 알력 싸움을 하던 샤킬 오닐이 마이애미의 영건들과 트레이드되면서 마이애미에 합류한다. 이때만 해도 오닐의 위력은 여전했고 웨이드와 원투펀치를 이루며 직전 시즌보다 +17승을 더 따낸다. 그리고 또다시 플레이오프 무대에 올라섰고, 이번에는 동부 지역 파이널까지 진출한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이지만 뒷심 부족으로 파이널 진출에 실패한다. 하지만 웨이드와 오닐 콤비는 기대 이상의 위력을 보여주었고, 차기 시즌의 전망도 매우 밝게 했다.

 

2005-2006 시즌이 시작되고, 이 시기부터 샤킬 오닐이 부상에 신음하기 시작하면서 불안하게 출발한다. 하지만 이미 완전한 에이스로 자리를 잡은 웨이드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고, 또 다시 플레이오프 동부 지역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를 만나 복수극을 성공시키며 생애 첫 파이널 무대에 오르게 된다.

 

상대는 덕 노비츠키가 이끌던 댈러스 매버릭스. 오닐이 오랜 기간 부상 끝에 기량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면서 파이널 2차전까지 내주게 된다. 그러나 웨이드만큼은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다. 그리고 시작된 3차전. 웨이드는 댈러스를 상대로 42득점-1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승을 따냈고, 반격의 봉화를 올렸다. 슈팅 핸드에 푸른 불이 들어온 웨이드는 거칠 것이 없었다. 4차전에서 36득점, 5차전 43득점을 기록하며 3승 2패로 시리즈를 뒤집었고, 기세를 몰아 6차전에서도 36점을 폭발시키며 생애 첫 우승을 달성한다. 파이널 평균 39.3득점을 기록한 그에게 파이널 MVP는 당연했다.

 

파이널 MVP를 수상한 'Flash' 드웨인 웨이드.

이후 전국구 스타 반열에 오른 웨이드였지만, 이듬해 샤킬 오닐이 부상으로 낙마하고 팀의 베테랑 개리 페이튼의 은퇴 등 어수선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여기에 팀을 지탱하던 웨이드도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하며 마이애미는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2008-2009 시즌 웨이드가 힘을 내며 평균 30.2득점으로 득점왕에 오르며 선전하지만, 한 번 떨어진 팀의 분위기는 올라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이애미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Chapter 03. 마이애미 Big 3 시대의 서막이 오르다.

웨이드는 계약 연장 기간이 되자 망설임 없이 마이애미와 연장 계약을 체결한다. 공교롭게도 카멜로 앤서니를 제외한 2003 NBA 드래프트 출신들이 자유 계약으로 풀리게 되고, 마이애미는 토론토 랩터스에서 외로운 싸움을 펼치던 크리스 보쉬를 영입하며 웨이드에게 든든한 지원군을 붙여준다. 그러나 마이애미의 광폭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유 계약 최대어로 꼽혔던 르브론 제임스가 마이애미로 합류했다.

 

르브론 제임스 (좌) - 드웨인 웨이드 - 크리스 보쉬 (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각 포지션 부문 최고 레벨의 선수들이 뭉치면서 온갖 비판과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르브론 제임스는 스몰 포워드를 넘어 NBA 무대에서 손꼽히는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크리스 보쉬는 파워 포워드로서 골밑을 지배하고 있었다. 웨이드는 말할 것도 없이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슈팅 가드 투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3년 NBA 드래프트 중 1순위 (르브론 제임스), 4순위 (크리스 보쉬), 5순위 (드웨인 웨이드)가 뭉친 것은 리그 역사 상 최초로 있는 일이었고,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그들이 얼마나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칠지 기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2010-2011 시즌 시작하기도 전에 마이애미 히트는 리그 역사상 최강의 팀으로 남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2010-2011 시즌. 4연승을 달리며 기대에 부응하는 듯하였지만, 팀 플레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공을 잡아야 힘이 나는 온 볼 플레이어인 르브론 제임스와 드웨인 웨이드의 공존은 불가능했다. 르브론 한 번, 웨이드 한 번으로 이어지는 요절복통 공격 전술은 상대 수비에 가로막히게 된다.

 

그러나 웨이드가 르브론에게 볼 핸들러의 역할을 양보하고 2옵션을 자처하게 되면서 톱니바퀴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르브론의 지휘 아래 웨이드-보쉬는 신명 나는 공격 농구를 펼쳤고, 무려 12연승을 치고 나가는 등 최종 성적 58승 24패를 기록하며 동부 지역 2위로 정규 리그를 마감한다.

 

플레이오프에서 필라델피아 - 보스턴 - 시카고를 연달아 격파하며 동부 패권을 차지하고 파이널에 오른 마이애미의 상대는 5년 전 웨이드의 역대급 퍼포먼스의 희생양이었던 댈러스 매버릭스였다. 시리즈 내내 팽팽한 접전을 펼쳤고, 댈러스는 덕 노비츠키가 독감에 걸리면서 힘든 싸움을 이어나간다. 이에 르브론과 웨이드는 노비츠키의 독감을 흉내 내며 그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 팬들에게 질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각성한 노비츠키의 맹활약, 르브론 제임스의 부진 등이 겹치며 댈러스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절치부심하여 맞이한 2011-2012 시즌은 NBA 직장 폐쇄로 인해 단축 시즌으로 맞이하게 된다. 지난 파이널 무대에서 부진했던 르브론 제임스가 예전의 위용을 되찾음과 동시에 공격과 수비 모두 괴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규 시즌에도 몬스터 퍼포먼스를 보이며 정규 리그 MVP를 수상했고, 그 기세를 몰아 파이널에서 만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4:1로 패퇴시키며 파이널 MVP까지 르브론이 차지한다. 이런 르브론의 퍼포먼스는 마이애미의 프랜차이즈 스타, 웨이드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웨이드는 묵묵히 르브론의 조력자로 힘을 보태며 2012-2013 시즌 파이널 무대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꺾고 팀의 2년 연속 파이널 우승, 개인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이룩한다. 그리고 마이애미 왕조(3연속 우승)의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두고 또다시 샌안토니오와 조우하게 된다. 그러나 샌안토니오의 정신적 지주인 팀 던컨의 나이를 잊은 활약에 기세를 빼앗긴 마이애미는 5경기만에 패퇴하고 만다.

 

그렇게 시즌을 마무리하고 차기 시즌, 르브론 제임스가 클리블랜드로 복귀를 택하며 마이애미 Big3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Chapter 04. 마이애미의 이해할 수 없는 대우, 마이애미를 떠나다.

르브론이 떠났지만 크리스 보쉬가 재계약을 체결하며 팀에 잔류했고, 웨이드 또한 재계약에 응하며 팀에 남게 된다. 그러나 이미 많은 부상 마일리지가 쌓인 웨이드는 이전과 같은 폭발력을 보이지 못했고, 지난 4시즌 동안 르브론 제임스-드웨인 웨이드에게 공격 옵션을 양보했던 크리스 보쉬 역시 이전과 같은 지배력을 보이지 못한다.

 

찬란했던 영광의 시대가 저문 이후, 웨이드는 보쉬와 함께 마이애미에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며 경쟁력을 보이지만 서부 지역에서 나타난 신흥 강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약진, 갈수록 약해지는 팀의 전력 등을 보며 웨이드는 고민에 빠졌다. 여기에 마이애미의 사장을 역임하던 팻 라일리와 웨이드는 계약 문제로 불화가 발생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웨이드가 마이애미에서 뛰는 동안 단 한 번도 팀 내 연봉 1위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팀의 리더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가 얼마나 많은 양보와 헌신을 보여주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마이애미는 이미 노쇠한 그에게 노골적으로 대우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팀 메이트였고 절친인 르브론 제임스가 골든스테이트와 해마다 파이널에서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클라호마시티의 에이스, 케빈 듀란트가 골든스테이트 합류를 결정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다. 르브론 제임스도 자신의 조력자를 얻기 위해 마이애미와 계약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웨이드와 미팅을 가진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의 샐러리 캡은 한도를 초과하여 웨이드를 영입할 수 없는 상황. 여기에 마이애미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웨이드의 행선지는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마이애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지친 웨이드는 고향 팀인 시카고 불스와 계약을 체결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마이애미를 떠나게 된다.


Chapter 05. 시카고 불스에서의 활약,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와의 재회

마이애미를 떠나 고향 팀 시카고에 몸을 담게 된 웨이드는 라존 론도-지미 버틀러와 함께 팀을 이끌게 된다. 시즌 초반 커리어 내내 약점으로 지적되던 3점 슛이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며 역시 웨이드라는 찬사를 받지만, 귀신같이 원래의 3점 슛으로 돌아오면서 부진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팀 내에서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최고참 타지 깁슨으로부터 승리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웨이드였지만 본인이 직접 나서서 이 사태를 무마한다. 팀 담합을 주도하고 훈련을 이끌기 시작하자 깁슨은 이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팀 분위기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릭 로즈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카고는 팀 로스터를 새로 구축하는 리빌딩을 선언한다. 이에 웨이드는 재계약을 포기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고, 르브론 제임스가 있는 클리블랜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그와 재회하게 된다.

 

클리블랜드에서 재회한 드웨인 웨이드 (9번) - 르브론 제임스 (23번)

카이리 어빙-르브론 제임스-케빈 러브로 인해 사치세가 포화 상태여서 수준급 선수를 영입할 수 없었던 클리블랜드에게 있어 웨이드의 합류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르브론 제임스도 매우 기뻐하며 그를 맞이했고, 다시 함께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웨이드는 시즌 초반 어이없는 실책을 기록하는 등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이내 반등하며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스스로 벤치행을 자처하며 팀의 벤치 경쟁력을 강화시켰고, 아이재아 토마스의 부상으로 인해 공석인 포인트가드로도 활약하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심지어 클리블랜드의 13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자신의 가치를 팬들에게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13연승 이후 연패의 늪에 다시 빠져들고 말았으며 타이론 루 감독의 무능한 경기 운영, J.R 스미스의 부상, 구단 매각설 등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팀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올스타전을 기점으로 클리블랜드와 마이애미가 트레이드에 합의하며 웨이드는 다시 마이애미의 품으로 돌아간다.


Outro. 마이애미의 심장이 되다.

마이애미로 돌아온 웨이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편안하게 플레이하며 팀의 젊은 피들을 돕게 된다. 2017-2018 시즌이 끝난 후 장고 끝에 마이애미와 1년 더 연장 계약을 체결한 그는 이번이 마지막 시즌이라고 공공연히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은퇴 시즌임을 밝힌다. 이제 그에게서 슈퍼스타다운 기량을 기대하긴 힘들었지만, 웨이드는 벤치 멤버로서 경쟁력을 선보이며 은퇴 시즌인 것이 아쉽게 만들었다.

 

2018-2019 올스타 전에서는 아담 실버 총재에 의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커리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던 덕 노비츠키와 특별 선수로 선발되며 올스타전을 의미 있게 보내게 된다. 웨이드는 올스타 유니폼이 담긴 액자를 선물 받고 기념사진을 노비츠키와 함께 찍는다. NBA 파이널 무대에서 두 번 만나 서로 한 번씩 승리를 따낸 그들이, 은퇴를 앞두고 같이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2018-2019 시즌을 끝으로 함께 은퇴한 덕 노비츠키(좌) - 드웨인 웨이드(우)

웨이드는 올스타전 이후 마지막 골든스테이트 전에서 엄청난 버저비터 샷을 터뜨리며 여전히 클러치 본능이 살아있음을 실감케 했고, 정규리그 마지막 홈경기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는 30득점을 뽑아내며 득점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2019년 4월 10일, 브루클린 네츠와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서 무려 25득점 11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정든 코트를 떠난다.


My faith is stronger than your doubt.

나의 믿음은 당신의 의심보다 강합니다.
- Dwyane Wade